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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결산 + 사사로운 리스트 본문

films

2020년 결산 + 사사로운 리스트

532o32 2020. 12. 31. 04:13

카테고리의 첫 글이 연말 결산이라니 웃기는 일이다. 근데 사실 이거 쓰려고 블로그 시작한 게 제일 커서ㅋㅋㅋㅋ 각설하고 정리해보겠다.

letterboxd.com/532/year/2020/

 

532’s 2020 in review

532’s 2020 in review

letterboxd.com

레터박스에서 잘 정리를 해주었지만 나는 또 내 방식이 있으니까. 

올해 처음 본 장편영화는 295편으로 역대 최고치를 갱신했다. (Thanks to COVID..) 사실 300편을 꾸역꾸역 채울 수도 있었지만 뭐 언젠가 채울 날이 있을 거라 믿고 여백을 남겨두었다. 

극장에 간 횟수는 71번, 쓴 금액은 총합 47만 6625원이다. (엑셀로 다 기록한다..) 극장에 204번 가고 116만원을 썼던 2018년보다도 본 편수가 많은데 이렇다는 건 모니터로 본 영화들이 절대 다수라는 것. 사실 나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극장을 못 갔었기 때문에.. 락다운만 아니었어도 이거 보단 더 갔을 듯. 한편 영화 관람 횟수 차이는 3배 가량인데 금액은 2배 좀 넘는다는 점에서 티켓값 인상의 여파가 느껴진다.

올해 가장 처음으로 본 영화는 자크 타티의 <윌로 씨의 휴가>이고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에릭 보들레르의 <드라마틱 필름>이다. (재관람을 포함한다면 각각 <주전장>과 <화양연화>)

극장 기준으로 본다면 1월 11일에 메가박스 성수 MX관에서 본 <스타워즈: 스카이워커의 재기>가 첫 영화, 오늘 CGV용산아이파크몰 15관에서 본 <화양연화>가 마지막 영화가 되겠다. 극장에서 두 번 본 영화는 <언어와의 작별>, <테넷>, <공포분자> 그리고 <화양연화> 네 편이다. 


2월 말에 락다운 되면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영화나 실컷 보자 했었고, 그거 보는 재미로 그 시기를 버틴 거 같다. 출근해서는 전날 본 영화평을 레터박스에 쓰는 습관도 들였고. 락다운 이후로 본 영화는 몇 개를 빼고는 다 짧게라도 평을 썼다. 또 이 때가 아니었다면 영원히 못봤을지도 모르는 <트윈 픽스> 정주행을 끝내기도 했다. 사사로운 리스트로는 올해 영화들을 꼽을 것이지만 사실 나에게 2020년은 포드, 르누아르, 타티, 미조구치, 부뉴엘, 카사베츠 그리고 로셀리니를 (재)발견하는 해였으며 오즈, 바르다, 키아로스타미, 로메르, 린치, 양덕창 그리고 라이카트를 더 사랑하게 된 해였다. 특히 오즈의 현재 볼 수 있는 장편을 모두 끝냈다. 사실 매 주 한 편씩 보려고 했는데 락다운 풀린 뒤로는 영 못보다가 전역 직전에 몰아서 다 끝냈다. 그리고 전역 후에 하스미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를 읽는 것이 최종 계획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아직 펴보지도 못했다..

사실 정말로 사사로운 리스트는 앞서 말한 감독들의 영화로 채워진 리스트겠지만 솔직히 그건 나한테나 의미있지 2020년의 리스트로서는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리스트는 2020년에 극장, VOD, OTT, 영화제로 공개된 영화에 한해서만 뽑을 것이고, 기간은 2020년 1월 1일부터 12월 31일 사이이다. 항상 12월 영화들은 그 해 리스트에 못 끼는 설움이 있는데, 나는 평론가도 아니고 그렇다고 버락 오바마도 아니기 때문에 급할 것이 없으므로 한 해를 통째로 대상으로 포함한다. (그럼에도 '사사로운'이란 표현을 유지하는 이유는 KMDB에 언젠가는 진출하겠다는 야심이 절반이요, 영화를 고른 기준이 전적으로 나에게 준 감흥이기 때문이 절반이다.)

(순위는 따로 없고 순전히 내가 본 순서대로 적었다)

조쉬 & 베니 사프디, <언컷 젬스 (Uncut Gems)> 
페드로 알모도바르, <페인 앤 글로리 (Dolor y gloria)> 
김도준, 김미영, 김승화, <보라보라> (전주 온라인상영)
크리스티안 펫졸트, <트랜짓 (Transit)> 
홍상수, <도망친 여자> 
하라 카즈오 <미나마타 만다라 (水俣曼荼羅)> (부국제)
강유가람, <우리는 매일매일> (에무 '우리영화의얼굴')
이란희, <휴가> (서독제)
장윤미, <깃발, 창공, 파티>  ('현장을지키는카메라에게힘을' 온라인상영)
켈리 라이카트, <퍼스트 카우 (First Cow)> (아마존 파일 추출.. 전 게시글 참조)

의도한 바는 전혀 없지만 한국영화 5편, 외국영화 5편이 되었다. 사실 예년 같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올해 다큐멘터리들이 너무 좋았다. 또 여성감독 영화가 4편이고 <보라보라>의 경우 공동감독 세 명 중 두 명은 여성이다. 여성영화인들의 활약은 한 해 한 해가 다르게 대단해지고 있는 것 같다..고 적고 나서 보니 작년에도 4편이 여성감독 영화였다😅
극장으로든 다른 플랫폼으로든 와이드릴리즈 된 것은 4편 뿐인데, 그런 영화들을 대상으로만 했다면 정말 재미없는 리스트가 됐을 것이다. 작년에 넣었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과 <남매의 여름밤>이 들어갔겠지. 좋은 영화들이 많은 사람들과 만났으면 좋겠는데, 이렇게 발품을 팔아야만 만날 수 있다는 게 슬프다. 모두가 나처럼 이런 걸 찾아볼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코로나 덕분에 온라인 상영 덕분이 많아져 지역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좋은 영화들을 만날 수도 있었고, GV에서도 채팅방을 사용하는 것이 나같은 소심이에겐 훨씬 좋았다. 큰 영화들이 사라져서 작은 영화들이 큰 상영관에 걸리는 것 역시 뜻밖의 장점이었다. (그 덕에 화양연화를 용산 15관에서 보는 일까지 생기고..) 또 리스트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었던 영화들 10편을 뽑아보았다. 역시나 관람한 순서고, 와이드 릴리즈 된 작품은 3편 뿐이다. (...)

박문칠, <보드랍게> (전주 온라인 상영)
다미앙 매니블, <이사도라의 아이들 (Les Enfants d'Isadora)> (전주 온오프 상영)
샘 페더, <디스클로저 (Disclosure: Trans Lives on Screen)>
정진영, <사라진 시간>
남궁선, <여담들> (전주 극장상영)
프레드릭 와이즈먼, <시티홀 (City Hall)> (부국제)
박윤진, <내언니전지현과 나>
정여름, <그라이아이: 주둔하는 신> (서독제)
권민표, 서한솔, <종착역> (서독제)
에릭 보들레르, <드라마틱 필름 (Un Film Dramatique)> (mubi)

 

아래는 메인 리스트 10편에 대한 짧은 기억들과 기록들.

 

 

 

<언컷 젬스>

 

 사실 <굿 타임>을 그렇게까지 재밌게 보진 않는 입장에서 약간의 걱정을 안고 넷플릭스로 영화를 틀었다. 영화 시작 몇 분 만이 그런 걱정은 싹 다 잊어버리고 손에 땀을 쥐며 보았다. 보고난 후 내가 할 수 있었던 말은 하나. "무시무시한 재능이다." 사프디라는 재능이 만들어낼 작품들을 어서 빨리 보고 싶다.

 

 

 

<페인 앤 글로리>

 

 마침 피곤할 때 본 영화라 졸음을 참느라 힘들었고 보고 나서도 그냥 그러네 싶었는데 갈수록 감흥이 커진 케이스다. 고통과 영광, 고통(삶)과 영광(영화). 고통이 있기에 영광이 있다. 영화가 있기에 고통이 영광이 될 수 있다. 알모도바르 자신의 삶과 영화를 동시에 담은 <페인 앤 글로리>의 마지막 줌 아웃은 잊을 수 없을 것.

 

 

 

<보라보라>

 

 전주 온라인 상영이 시작하고 가장 먼저 결제해서 본 영화다. 서울에서 있었던 톨게이트 노동자 투쟁에도 참석해 노조 율동패 '보라보라'의 공연도 직접 봤던 입장에서 더 감정이입한 채로 볼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을 어떻게 그들을 대상화하지 않고 보여줄 것인가? <보라보라>는 그 고민에 대해 단순명료한 답변을 내놓았는데, 바로 노동자 자신들이 직접 카메라를 드는 것이다. 이 영화를 기획한 김도준 감독은 외부에 의해 차단된 노조원들에게 몰래 카메라를 전달해 촬영을 부탁했고, 그들 중 카메라를 주로 잡은 두 여성노동자와 셋이서 이 영화를 연출했다. 내가 관람한 전주 버젼은 150분이었는데, 이후 DMZ 등에서는 180분으로 30분이나 늘어났더라. 그 편집본도 보고 싶다. (사실 온라인 상영으로 볼 수 있었는데 놓쳤다..)

인터뷰 중 김도준 감독이 답변한 자신의 원칙
: 세상은 단순하지가 않다 (입체적으로 보여주자)
기계적인 중립을 취하지 말자.
그렇지만 내가 보고싶은 대로만 사태를 보진 말자.
간단해보이지만 실천하긴 너무나 어려운 사항들. 그럼에도 영화는 잘 해낸 거 같다.

 

 

 

<트랜짓>

 

 청주에서 친구와 둘만 있는 상영관에서 본 <트랜짓>.. <통행증>이란 제목으로 몇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영화가 2년만에 개봉을 했다.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 떠나진 자와 남겨진 자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유령들의 이야기를 '시대착오'라는 개념을 통해 너무나 매력적으로 잘 만든 영화였다. (사견이지만 많이들 칭찬하는 <마틴 에덴>의 '시대착오'는 정말 시대착오적이었다면 <트랜짓>의 '시대착오'는 참으로 모던했다)

 

 

 

<도망친 여자>

 

 <밤의 해변에서 혼자> 이후 홍의 영화에 열광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이건 좀.. 싶었던 <클레어의 카메라>를 제외하고는 모두 흥미롭긴 했지만 이전 홍의 영화처럼 나를 홀리지는 못했다. 그런 와중 나타난, 정말 천진하고 단순하게 보이는 <도망친 여자>는 여전히 홍상수는 새로운 경지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해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이 영화를 현실 세계 속 김민희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한 영화로 보일 여지가 많다는 것에 동의한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프레임만으로 영화를 바라볼 것이라면 홍상수의 영화를 구태여 볼 이유가 있는지 모르겠다.. 여자들의 세계에 침입한, 뒷모습만 나오는 세 남자가 자아내는 코미디를 보는 재미만 해도 충분하지만, 나는 요새 이 영화 속 세 종류의 스크린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있다. CCTV, 인터폰 화면 그리고 영화관 스크린. 앞의 두 스크린에서는 불청객이 등장한 반면 영화관의 스크린에서는 바다가 나온다. 영화 속 세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연결해주던 것은 산이요, 서울에서만 찍은 이 영화에서 결코 등장할 수 없는 것은 바다이다. 이 바다는 홍의 2009년 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엔딩을 장식한 바다이지만, 감희가 보고 있었던 것이 그 영화는 아니겠지. 게다가 처음에는 흑백이었다가 영화의 끝에는 컬러로 변한다. 세 개의 스크린, 흑백의 바다와 컬러의 바다. 게다가 닭에서 시작해 고양이를 거치며 비인간동물에까지 (송경원의 표현을 빌려) 홍상수 영화라는 '덩어리'의 표면이 넓어지는 것을 보며 그와 동시대를 산다는 것은 꽤나 (물론 순전히 영화팬으로서) 즐거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미나마타 만다라>

 

 하라 카즈오의 영화는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과 <극사적 에로스> 두 편만을 보았기에 그의 방법론에 대해서 단언하기는 힘들지만, <미나마타~>와 <센난 석면~>을 보며 느낀 것은 '이 인간 참 집요하다' 그리고 '이 사람 참 솔직하다' 두 가지이다. 6시간 반이라는 러닝타임을 자랑하지만 이 시간은 어떤 '체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말 유의미한 정보들로 꽉꽉 차있으며 이해를 돕기 위해 그래픽을 사용하는 데에도 거리낌이 없다. 하라는 15년이라는 시간동안 미나마타 병의 실체를 밝히려는 양심적인 의사들, 국가와 소송을 하는 피해자들과 함께했고 그들의 주장을 집요한 방식으로 입증한다. 또 그들과의 정서적 교류도 영화에 숨김 없이 담았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 15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들의 투쟁을 기록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감독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은 영화였다. (이 영화 촬영 도중에 <센난 석면~>과 같은 긴 소송전 영화를 또 찍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

 

 

 

 

 작년에 <이태원>을 보고 팬이 된 강유가람 감독님의 신작인데, 상영회 신청했는데 늦어서 그냥 안 갔던 사건 이후로 상영 일정들이 계속 맞지를 않아서 못 보다가 (물론 락다운 때문에 못 간 것도 꽤 되고..) 에무시네마에서 감독님 GV와 함께 하길래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 하고 보러 갔다. 상상마당을 통해 개봉한 <이태원>과 마찬가지로 <우매일> 역시 그러려고 조율 중이었다는데 지금 상상마당이 그 꼴이 나서.. 개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ㅠㅠ

어쨌든 기대가 엄청 컸음에도 그만큼 좋았던 영화였고, 교지 지원서에도 써먹기까지 했다. <김지은입니다>를 읽으며 “가해자는 감옥으로 피해자는 일상으로”라는 익숙한 구호가 뼈에 사무치게 와닿았다면 <우리는 매일매일>을 보면서는 “우리는 서로의 용기다”라는 문구가 새삼 피부에 와닿았다. 나와 같은 믿음을,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주는 엄청난 위로를 느꼈다. 하지만 '흐른'님의 주제가가 말하듯 “서로에게 신호를 보내줘”야 각자의 존재를 알 수 있고, “언제라도 이어질 수 있”을것이다. 이렇게 블로그를 열고, 교지에 지원하고 한 것도 이 영화의 응원 아닌 응원 덕분이었다. 

 

 

 

<휴가>

 

 부산에서 상영할 때는 있는 줄도 몰랐던 영화인데, KMDB 사사로운 리스트에 이 영화를 올린 평자들 덕분에 알게 되어 서독제 때 보았다. 사실 이 영화 끝나고 10분 후에 다음 영화를 보러 들어가야했는데, 애써 울컥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이동했던 것이 생각난다. 사실 영화의 플롯은 단순하다. 레터박스에 보니까 어떤 외국 유저가 Dardenne-esque라고 표현했던데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기도 하고. 하지만 다르덴의 열심히 흔들어서 '리얼'하게 보이려는 카메라와 <휴가>의 카메라는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으로서, 픽션 영화에서 강남역 철탑 밑의 농성장을 목격했을 때 가슴이 철렁했던 느낌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휴가>는 5년 간 쉼없이 복직투쟁을 한 노동자 재복의 일주일 간의 휴가를 저벅저벅 따라가고, 결국 투쟁으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는 동시에 눈물이 떨어지게 만든다. 또 한편 <휴가>는 밥을 해준다는 것,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한국영화는 역시나 밥심인 것인가.

 

 

<깃발, 창공, 파티>

 

 여성노동자들의 노조활동을 다룬 긴 다큐라는 점에서 <보라보라>와 겉보기엔 유사해보일 수 있지만 그것 외에는 둘은 상당히 다른 결의 영화였다. 오히려 '일상이 된 투쟁'이란 테마로 <깃발, 창공, 파티>와 <휴가> <재춘언니> 그리고 좀 넓게는 <우리는 매일매일>은 함께 묶일 수 있는 영화였다. 상당히 긴 러닝타임 동안 KEC지회는 굉장히 뚜렷한 목표, 단일호봉제 도입을 위해 싸우지만 이 과정은 우리가 흔히 '노조한다'하면 생각하는 것처럼 파업과 시위가 아닌 전단지를 나눠주고, 설명회를 열고 무엇보다 '어용'노조의 사람들을 설득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2시간 40분의 러닝타임 동안 자막으로 설명이 나오는 부분은 딱 두 번이다. 영화는 (여성)노동자들이 토론하고, 회사 안의 문제를 설명하는 긴 장면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런 면에서는 와이즈먼의 영화들이 떠오를 정도였다. "노조하려고 태어난 사람이 없다"고는 하지만 그들은 정말 본투비 노조원처럼 하루하루 토론하고 필요한 서류들을 만들고 운동을 준비한다. 이들에게 이미 투쟁은 삶이 된 것이다. 이것은 반드시 슬픈 것은 아니다.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개미들은 계속해서 연대하고 투쟁해야만 한다. 그들은 너무 작기 때문에. 연대하고 투쟁할 때만 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퍼스트 카우>

 

 작년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 그랬듯 이 리스트에 넣을 것을 예견하고 (더 정확히는 넣으려고) 본 영화이다.  <믹의 지름길>과 <어떤 여자들>을 보고 완전히 압도당해 버린 뒤 내가 가장 신작을 기다리는 시네아스트가 되어버린 켈리 라이카트의 신작인데다가, 온갖 연말 리스트에서도 최상위권에 위치한 것을 보며 기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줄거리를 읽어본 적이 없어서 나는 그냥 주인공이 소랑 같이 여행하는 이야기인가 했었는데 웬걸 (친구의 표현을 빌리면) '쿠키의 골목식당'이었다ㅋㅋㅋ 200년 전 미국으로 한 순간에 타임슬립 한 영화는 아직 원시적인 형태의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두 친구의 모습을 보여주며 결국 어떻게 자본주의가 소중한 가치들(이 영화에서는 우정)을 죽였는지를 간접적으로, 하지만 매우 서늘하게 보여준다. 또 라이카트 영화에서 계속 등장하는 아메리카 원주민들, 그리고 두 주인공 중 한 명으로 등장한 중국인의 존재는 대체 웨스턴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그의 계보에 그대로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믹의 지름길>에서 4:3 화면비를 통해 자신의 프레이밍 실력을 보여준 그 답게 <퍼스트 카우>의 4:3 화면 역시 훌륭했다. 무엇보다도 풍경과 길의 영화인 라이카트의 영화니 그저 오레곤 주 자연의 또다른 모습을 즐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여정이 되리라고 믿는다.

 

처음에는 짧게 짧게 쓰려고 했는데 쓰다보니까 길어졌다.. 본 지 얼마 안된 작품일 수록 기억이 많이 나서 할 말이 많은 거 같기도 하고. 어쨌거나 나로서는 가야할 해였다보니 별다른 아쉬움이 없다. 책을 좀 더 많이 읽을 걸 하는 아쉬움 정도는 있지만 그건 만성으로 있는 아쉬움이니까. 아직 제대로 만나지 못한 작가들 - 카우리스마키, 자무쉬, 루비치, 파스빈더, 이스트우드, 리베트, 알트만, 드 팔마, 파웰과 프레스버거, 스트라우브와 위예, 가렐, 웰즈, 두기봉, 요시다 기주, 마스무라 야스조, 구로사와 기요시 등등 - 도 많고 필모를 깨고 싶은 감독들 - 포드, 르누아르, 키아로스타미, 나루세, 아커만, 차이밍량, 후효현, 레네 - 도 꽤 있지만 일단 올해는 독서에 더 초점을 맞추고 싶다. 언젠가는 이렇게 해 바뀌기 전에 영화 결산 올리겠다고 급히 타자를 두드리고 있는 영미새에서 탈출할 날이 올까? 오기를 바라는 것도, 올 것 같지도 않지만 사람 일은 모를 일이다. 

 

(+) 그래도 아쉬우니 올해 처음 만난, 가장 인상 깊었던 옛날 영화들을 적어본다. (역시나 본 순서)

존 포드, <말 없는 사나이>

자크 타티, <트래픽>

미조구치 겐지, <산쇼 다유>

차이 밍량, <안녕, 용문객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Certified Copy>

루이스 부뉴엘, <절멸의 천사>

루이스 부뉴엘, <자유의 환상>

에릭 로메르, <나무, 시장, 메디아테크>

아녜스 바르다, <Les Demoiselles ont 25 ans>

존 포드, <태양은 밝게 빛난다>

클로드 란즈만, <쇼아>

장 르누아르, <강>

장 르누아르, <황금 마차>

허우 샤오시엔, <밀레니엄 맘보>

그리고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픽스: 더 리턴>